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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사랑의 종

20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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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사랑의 종
'글. 박순철'

    한 장밖에 남지 않은 2021년 달력을 바라보던 소갈 씨가 머리를 흔든다. 무엇이 잘 풀리지 않거나 아쉬운 일이 있을 때 취하는 행동이기에 그의 아내는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다. 아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게딱지만 한 자신의 서재로 들어 가버린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서재에 들어간 남편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책꽂이에서 파일을 하나 꺼내 살펴보기 시작한다. 
     “새해 약속” 
    o. 하루 만 보(2시간) 이상 걷기, 
    o. 하루 한 가지 이상 착한 일 하기, 
    o. 사랑의 종.
    볼펜을 들어 첫 번째 내용 끝에 동그라미를 친다. 소갈 씨는 매일 2시간 이상 걸은 게 확실하다. 아침 10시쯤 되면 운동화를 신고 명암 약수터를 향해 나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쩌다 시내 볼일, 모임, 점심 약속이 있으면 거르는 때도 있었다. 그러면 운동 시간이 오전에서 오후로 바뀌거나, 아니면 이튿날 곱빼기로 4시간을 걷는다. 그러지 않으려고 어느 때는 새벽이나 밤에 걷기도 했으니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철저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성싶다.
    두 번째 글 옆에는 삼각(△) 표시를 한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실천했으면 동그라미를 하든가, 아니면 엑스(X) 표시를 해야 명확한 게 아닌가. 삼각(△) 표시는 목표에 절반 정도 도달했다는 징표로 봐도 될 것인지 어째 어정쩡하다.
    세 번째 사항, “사랑의 종”?. 이게 무슨 말인가? 뭐 ‘불우이웃 돕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답을 보류하는 것으로 보아 실천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소갈 씨가 모든 것을 털어버리듯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무엇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또 속이 상할 때 그가 취하는 행동은 산으로 내닫는 방법이다. 산은 용케 그런 소갈 씨를 잘도 품어왔다. 아니, 소갈 씨뿐 아니라 그 누구도 내친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찾아오는 게 고마워서 두 팔 벌려 환영은 못 해도 묵묵히 받아주는 넉넉한 인정을 베풀고 있음을 모두는 알고 있는 사실이다.
    평소 명암 약수터를 향해 갈 적에는 빈 몸으로 나서던 사람이 오늘은 작은 배낭에 물 한 병을 챙겨 넣고 딸아이가 사준 스틱까지 찾아서 들고 나선다. 
    소갈 씨가 산성 가는 시내버스에서 내린 곳은 일명 “굴다리”라고 하는 산성 입구였다. 오른쪽으로 자라고 있는 잣나무 숲이 푸르기만 하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이정골 저수지 가장자리는 살얼음이 얼어있는 듯했다. 이 길은 소갈 씨가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고 안개가 자욱한 것 같던 머리도 이내 맑아진다.
    어저께였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들어서자 저만큼 앞에서 손수레를 끌고 고물상으로 향하는 할머니가 보였다. 골목 끝에 고물상이 있어서 자주 보는 모습이다. 손수레에 골싹하게 실린 종이 상자 나부랭이, 마음이 짠했다. 그것도 끌고 가는 게 힘들어 보였다. 밀어주는 것을 알아채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해 오히려 소갈 씨가 더 미안할 정도였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가는 곳이 상당산성이다. 집에서부터 걸어가면 2:30분 정도, 전에는 걸어갔다가 걸어 내려왔지만 이제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가는 길이든 오는 길이든 한번은 버스를 이용한다. 그런데 오늘은 상당산성이 아니라 낙가산으로 향한다.
    영하의 찬 바람을 쐬니 정신이 맑아진다. 낙가산 정상에 오르자 울적하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역시 산에 오긴 잘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멀리 파랗게 보이는 하늘이 오늘따라 더욱 청명하게 느껴졌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았다. 소갈 씨가 알고 있는 길이 아니었다. 되돌아가기는 늦은 것 같아 그냥 보이는 길을 잡아 내려갔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내려가는 길이 희미했다. 큰길에 도착해보니 시 외곽 도로였다. 능선 하나 잘못 넘은 게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난감했다. 날은 춥고 다른 교통수단도 없다.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카카오 택시도 잘 불러서 타더구먼, 소갈 씨 세월만 축내고 살았지 그런 것에는 깜깜이니 어쩌면 좋으랴. 하는 수 없이 시내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얼마를 걸어갔을까. 다리가 아파져 온다. 찬바람은 옷깃을 파고들고 슬슬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마침 지나가는 승용차가 있어 손을 들었으나 못 본 채 쌩하고 지나가 버린다. 이번에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든다. 소갈 씨를 지나칠 것 같더니 조금 지나 멈추었다. 그러나 ‘쉬는 차’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50 가까이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쉬는 날이어서 손님을 태울 수 없어요.”
    “상당산성에서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 이 고생을 하고 있어요. 다리도 아프고 죽을 지경입니다. 좀 태워주세요”
    “지금 시내 나가는 길이기는 한데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그러면 시내버스 탈 수 있는 곳까지만 태워주세요.”
    “그럼 타세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근 3시간 넘게 산길을 걸었으니 소갈 씨 체력은 바닥이 나가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어디서 내려 드릴까요?”
    “금천동 방향으로 가다가 드림타워 앞에서 내려주세요.”
    “아, 그쪽으론 안 가고요. 그 근방 동중학교 앞에서 내려 드릴 테니 조금만 걸어가세요.”
    “네. 고맙습니다.”
    동중학교까지만 가면 집에 다 간 것이나 진배없다. 거기서 한 정거장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다. 소갈 씨가 지갑을 열어보니 1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나왔다. 쉬는 차 사정해서 타 놓고 카드를 내밀기도 그랬다. 
    “기사님 덕분에 정말 잘 왔습니다. 거스름돈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1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자 후덕하게 보이는 기사 양반, 손사래를 친다.
    “아닙니다. 가는 길에 태워드린 것뿐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택시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휭하니 떠나가 버린다. ‘이 각박한 세상에 어째 이런 일이?’ 호박이 넝쿨째 굴렀다는 표현이 맞을까. 미모의 여성이 운전하는 개인택시를 공짜로 타고 왔으니 소갈 씨 복 받은 날인가보다.
    기분 좋게 발걸음을 떼어놓는 소갈 씨 앞에 구세군 복장을 한 사관이 보였다. 자선냄비에 지나가던 어린이가 고사리손으로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성금을 넣는 모습도 보였다. 소갈 씨도 주머니에 손을 넣자 조금 전 택시비 내려고 꺼냈던 1만 원짜리 지폐가 손에 집혔다. 그것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지갑에는 돈이 없고 핸드폰 집 뒤에 비상금으로 넣어놓은 5만 원짜리 지폐가 두 장 나왔다. 그 돈까지 털어서 구세군 냄비에 넣으니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수중에 돈이 더 있었다면 더 넣고 싶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