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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겨울나무

202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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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겨울나무
'충북의 숲과 나무?영동Ⅱ'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반야사 경내 500년 넘은 배롱나무, 반야사를 휘감고 흘러내린 석천 시냇물가 400년 넘은 느티나무, 마을 어귀에서 400년 넘게 사람들을 쉬게 하는 영동읍 가리(상가리) 느티나무 숲, 500년 세월 마을을 지키는 터줏대감 양강면 만계리 마이곡실 탱자나무와 느티나무, 겨울나무 우듬지 까치밥 감나무와 11종의 나무가 한 나무에서 함께 자라는 학산면 미촌 마을 ‘화합의 나무’, 겨울이 혹독할수록 나무는 따듯하다.
500년 넘은 반야사 배롱나무 
    뒷산의 형국이 소 같아서 마을 이름이 우매리가 됐다. 우연일까? 우매리는 여러 마을을 합쳐 부르는 행정동인데, 그 안에는 반야마을도 있다. 깨달음은 찰라지만 그 경지까지는 지난하지 않겠는가. 불교에서는 그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심우’라 한다는데,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에 반야사가 있어 깨달음 이후의 그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삼국시대 이후 남북국 시대 때 통일신라의 고승 누군가가 창건했다는 반야사의 내력 보다, 조선시대 세조 임금이 사자를 타고 나타난 문수보살의 보살핌으로 앓던 병이 나았다고 하는 전설 보다, 보물로 지정된 반야사 삼층석탑의 작위보다, 반야사에서 500년 넘게 자라고 있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마음에 남는다.
 
반야사 삼층석탑(보물)과 500년 넘은 배롱나무?????

    한겨울 배롱나무 줄기는 스스로 혹독하다. 철갑을 두른 껍질도 없이 엄동에 북풍한설을 다 견딘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는 백일홍, 들끓던 그 한때의 소용도 다 버리고, 내려갈 길을 없애며 산정으로 오른다는 조선시대 어떤 선비처럼 반야사 배롱나무는 500년도 훨씬 넘는 겨울을 그곳에서 지키고 있다. 
    산비탈이 무너지면서 만들어졌다는 호랑이 형상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반야사를 휘감고 돌아 흘러가는 석천, 냇가에 있는 400년 넘은 느티나무였다. 텅 빈 밭 가생이에 서있는 그 나무는 쉼표다. 엔진을 돌리며 밭일 논일 다 했던 농기계가 느티나무 고목 아래서 숨을 고른다. 허름한 정자 아래 흐르는 냇물 위로 겨울바람이 분다. 
    400년 넘은 느티나무는 영동읍 가리(상가리) 어귀에도 있다. 마을 어귀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가 작은 쉼터를 만들었다. 그중 두 그루는 400년이 넘었다. 도랑에, 고목이 만든 쉼터에 낙엽이 쌓여 푸근한데, 나뭇가지는 텅 비었다. 
마을의 터줏대감 느티나무와 탱자나무
    발길은 500년 넘은 탱자나무와 느티나무가 있다는 영동군 양강면 만계리로 향했다. 만계리의 자연 마을 이름은 마이곡실이다. 마을이 들어선 형국이 말 귀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500년 넘은 느티나무는 마을 가운데 있었다. 그 나무 옆, 어떤 집 울타리 안에 500년 넘은 탱자나무도 보였다. 빨랫줄에 널린 빨래, 마당에 널린 생활의 편린이 500년 넘은 탱자나무 곁에서 천연덕스러웠다.   
    느티나무와 탱자나무를 오래 보았다. 500년 세월 동안 날을 세운 굵고 날카로운 탱자나무 가시도, 거대한 줄기의 느티나무 고목도, 마을을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이었다. 이 마을 초창기에 정착한 사람들이 두 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와, 더 오래 전부터 산골짜기에서 자생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양강면 만계리 500년 넘은 탱자나무

    사람 없는 마을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길, 밭에서 일하고 있는 마을 사람을 만났다. 그는 아주 오래 전 이 마을에 정착한 몇몇 가문 중 한 가문의 14~15대 후손이라고 했다. 그가 500년 넘었다는 탱자나무와 느티나무 이야기를 해주었다. 
    500년 넘은 탱자나무가 지금도 꽃을 피우는 게 신기한데, 이 나무는 매년 3~4번 꽃을 피운단다. 첫 번째 꽃을 피울 때 꽃이 가장 많고 그 다음부터 꽃이 줄어든다. 탱자 열매도 처음 꽃을 피울 때는 매끈하게 달리는데, 두 번째 달리는 탱자는 배꼽이 생기고, 그 다음에는 배꼽이 더 크게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탱자나무 아래 떨어져 있던 탱자의 생김새가 그랬던 것 같다. 
까치밥과 화합의 나무
    ‘찬 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 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시인 김남주의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다.
    학산면 미촌 마을 어느 집 담장 안 감나무 우듬지에 붉은 감 몇 개가 남았다. 겨우내 먹을 것 없는 새들 먹으라고 따지 않고 남겨 놓은 것이다. 그것을 까치밥이라고 불렀다. 
    까치밥 남겨둔 감나무집 앞에 이른바 ‘화합의 나무’라고 알려진 왕버들나무가 있다. 250여 년 전 마을 시냇가에 뚝방을 만들면서 왕버들나무를 줄지어 심었는데, 그중 한 그루가 살아남은 것이다. 
 
左) 학산면 미촌마을 어느 집 담장 안 감나무에 까치밥이 달렸다. 
右)학산면 미촌마을에 있는 왕버들나무 고목. 11종의 수목이 이 나무에 붙어서 함께 자라고 있다. 그래서 화합의 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나무를 ‘화합의 나무’라고 부르는 이유는 나무에 11종의 다른 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산벚나무, 쥐똥나무, 까마귀밥여름나무, 이스라지, 올괴불나무, 산뽕나무, 팽나무, 산사나무, 겨우살이, 환삼덩굴, 쑥 등이 어울려 자라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 백로와 왜가리 서식지가 있는데, 그 새들과 숲에 사는 동물이 오가면서 이 나무에 종자를 전파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영동의 나무와 숲을 찾아다닌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양산면 송호리 송림이었다. 한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 숲, 푸르게 흐르는 금강의 유장함을 품은 숲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시대, 신라와 백제군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이곳이다. 당시 신라의 김흠운 장군이 전사했고, 신라 사람들은 양산가를 지어 그의 넋을 위로했다. 양산가를 새긴 비석이 송호리 송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