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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품은 옛 이야기는 나무처럼 푸르러지고

2021-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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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품은 옛 이야기는 나무처럼 푸르러지고
'충북의 숲과 나무?보은Ⅱ'

    나무가 품은 옛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새롭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살았다는 은사뜰(은사동) 마을 숲을 바라보며 흰 옷 입은 선비들이 숲을 거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생각만으로도 운치가 산다. 임진왜란 의병장 조헌 선생이 수리재 전투 당시 의병들과 함께 쉬었다는 느티나무 그늘은 오늘도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쉬게 한다. 송현리, 갈평리, 오동리... 마을마다 마을을 지키고 있는 고목들이 오늘도 푸르다. 홍수에서 마을 사람들을 살린 구티리 느티나무 앞 길가, 지붕 낮은 집들이 햇볕 아래 순박하다.
은사뜰(은사동) 소나무 숲
    은사뜰(은사동), 수령 300년 안팎의 소나무 87그루와 버드나무 5그루가 마을 숲을 이루었으니, 그 이름만큼이나 풍경도 아름답다. 그 곳에 전해지는 사연 두 가지. 첫 번째, ‘은사(隱士)’라는 이름은 선비들의 은둔지라는 뜻이다. 
    보은군청 자료에 따르면 옛날에 이 소나무 숲에 선비들이 숨어 살았다. 그 까닭을 짐작하자면, 당쟁의 풍파를 피해 이곳을 찾았을 것, 아니면 아름다운 자연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려한 것 아닐까? 두 번째, 옛날에 선비들이 이곳에 들어와 소나무를 심었다는 얘기를 마을 주민이 들려줬다. 바람을 막아주고 마을을 지키는 방풍림이었다는 것이다. 마을과 사람들을 지키고자 했던 옛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닮은 마을 숲이 푸르다. 
 
충북 보은군 보은읍 금굴리 은사뜰(은사동) 마을숲. 300년 안팎의 소나무 87그루와 버드나무 5그루가 숲을 이루었다.

    은사뜰(은사동) 마을 숲은 논둑과 수로 둑에 200m 정도 길게 이어지는 형국이다. 나무 그늘 때문에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며 논 주인이 소나무를 베어내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대대로 내려오는 소나무 숲을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 덕에 푸르른 마을 숲이 남았다. 마을 숲 사이로 난 데크길 출입을 통제해서 그 길로 걷지 못했다. 숲 밖에서 논과 어우러진 마을 숲을 보며 그 숲을 거니는 하얀 옷의 선비를 떠올렸다. 생각만으로도 운치가 산다. 
    은사뜰(은사동)을 포함하는 행정동 이름은 금굴리다. 고려시대에 금이 많이 났다고 해서 ‘쇠푸니’ 또는 ‘금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쇠푸니는 은사뜰 남동쪽에 있다. 마을 주민이 어른들께 들었다며 옛 얘기를 들려줬다. 금굴리 동쪽 보청천 건너편 월송리에서 바라보면 쇠푸니 언저리가 금빛으로 반짝였다고 한다.  
보청천 금굴교 서쪽 삼거리는 주막거리였다. 현재 금굴1리에서 금굴2리로 넘어가는 언저리에 장고개라는 고갯길도 있었다고 하니,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팍팍한 다리를 쉬게 하고 허기를 달래주는 고마운 주막이었겠다. 
    보은읍 금굴리 은사뜰(은사동) 남쪽 삼승면 선곡리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보은 최감찰댁이 있다. 그 집 사랑채 앞마당에는 200년 넘은 회화나무가 지금도 푸르게 자란다. 회화나무는 지혜의 상징이자 악귀를 막는 나무로 여겨왔다. 
 
충북 보은군 삼승면 선곡리 보은 최감찰댁에 있는 200년 넘은 회화나무.
 
마로면 세 그루의 느티나무 이야기
    보은군 동남쪽 끝 마로면 송현리에는 5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 관기송현로에서 송현1길로 접어드는 초입 낮은 언덕에 우뚝 선 느티나무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이곳에 살던 박씨 삼형제가 심은 나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을 뒤 옥녀봉의 기가 이곳까지 뻗쳐 묘를 쓰면 그 자손들이 해를 입는다는 당시 풍수지리가의 말을 들은 박씨 삼형제는 누구도 묘를 쓰지 못하도록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 막내가 심은 나무는 당시에 죽고 두 그루는 잘 자랐는데, 근래 들어 큰 차가 두 그루 중 한 그루를 들이받았고, 결국 고사해서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있는 것이다. 
    느티나무 이야기가 있는 마을 이름이 송현(솔고개)이라니, 소나무에 얽힌 얘기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을 사람에 따르면 현재 송현1길을 따라 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소나무가 많은 고갯길이라고 해서 솔고개라고 불렀다. 솔고개 수영골에는 옻샘이 있어서 사람들이 찾아와 목욕을 했다. 그래서 수영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송현리와 인접한 갈평리에도 50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다. 갈평1구 노인회관 앞에 있는 두 그루 느티나무는 수령만큼 넉넉한 품을 지녔다.
    옛날에는 나무가 있는 마을을 안말이라고 불렀다. 안말 동쪽 골짜기는 가래 같이 생겼다고 해서 가래실, 남쪽은 달밭뜰, 서쪽은 다락논이 많아 다락논골, 북쪽 마을은 시루 같이 생겼다고 해서 증산골이라고 불렀다. 달밭뜰은 달밤들이라고도 했는데, 달밤에도 가뭄이 든다는 말이 전해진다. 밭에 돌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안말 느티나무 고목은 예로부터 이렇게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에 구병산 산제당에서 산제를 모시고 마을로 내려와 이 나무 앞에서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원래 느티나무가 네 그루 있었는데 두 그루는 고사했다.
    마로면에는 유명한 느티나무 고목이 또 있는데, 얼마 전에 고사했다. 고사한 모습이라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찾아갔다. 가지가 잘리고 허공에 뿌리를 드러낸 채 비스듬히 누워있는 그 나무가 바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원정리 느티나무다.   
 
01. 충북 보은군 산외면 구티리 느티나무. 1980년 큰 홍수 때 사람들을 살린 나무다.   02. 충북 보은군 회인면 오동리 600년 넘은 느티나무. 
03. 충북 보은군 마로면 원정리 느티나무가 고사했다. 500년 정도 된 이 나무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의병장 조헌과 차정리 느티나무
    청주와 보은을 잇는 보청대로에는 고개가 두 개 있다. 청주 쪽에서 보은 쪽으로 가다보면 피반령이 먼저 나온다. 피반령 고갯마루를 넘으면 회인면 오동리다. 그곳에 600년을 훌쩍 넘긴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 느티나무가 살아온 세월을 천 년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나무 밑동 둘레가 10m가 넘는다.   
    오동리를 지나면 두 번째 고개인 수리재(차령)가 나온다. 수리재를 다 내려서면 차정리 마을이다. 차정리 조중봉후율사 앞에 760여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가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 선생이 왜군과 싸우던 중 이 나무에 말을 매고 군사들과 함께 잠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592년 5월3일 청주에서 의병을 모으는 격문을 띄우고 보은으로 돌아온 조헌 선생은 김절, 김약, 박충검 등과 보은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았다. 회인을 거쳐 서쪽 곡창지대로 향하려던 왜군을 막기 위해 지략을 짰다. 수리재에 매복하고 있던 의병들은 왜적이 고개로 접어들 때 큰 돌을 굴리고 돌을 던지며 전투를 시작했다. 그날 왜병 20명을 죽이고 승전보를 울렸다. 임진왜란 중 최초로 왜군을 물리치고 저지한 전투였다. 보은군청 자료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증명하듯 이 마을에는 지금도 당시 전투를 ‘석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마을에는 당시 사람들이 피난했다는 피난봉, 화살을 만들었다는 활고개도 남아있다. 
    보은군 북쪽 산외면에도 느티나무 고목이 두 그루 있다. 광복 때 울었다는 장갑리 느티나무 고목과 사람을 살린 구티리 느티나무 고목이다. 구티리 보은 산외우체국 주변에 500년 넘게 살고 있는 느티나무가 있다. 1980년 7월 보은에 큰 홍수가 났었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 20여 명이 이 느티나무로 올라가 목숨을 구했다.
    마을에서 만난 아줌마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줌마는 인근에 있는 학교로 피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느티나무에 올라가 목숨을 구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다시 느티나무 앞에 섰다. 밑동에 누구의 기원이 담긴 금줄이 묶여있었다. 나무 앞 옛 도로가에 지붕 낮은 집들이 햇볕 아래 순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