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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주간지 K-공감
황골엿 전통 잇는 김명자·김기석 모자
'100년 된 가마솥에 6대째 엿물 끓이기 “몸이 삭아도 우리가 지켜야 할 전통”'

전날 내린 눈이 산 전체를 하얗게 뒤덮은 2월 말, 강원 원주시 치악산 입구는 특히 고요했다. 주민과 가끔 지나는 등산객을 제외하곤 인적이 드물었다. 이곳에서 6대째 가업을 지켜오고 있는 가족이 있다. ‘장바우 치악산 황골엿’의 5대 대표 김명자(67) 명인과 그의 아들이자 6대 대표인 김기석(43) 씨다. 김 명인은 100년 전통의 제조 비법을 계승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농림축산식품부 주관 ‘대한민국식품명인 제70호’에 선정됐다.

‘장바우 치악산 황골엿’의 김명자 명인과 김기석 씨는 매일 새벽 일어나 가마솥에 엿이 눌어붙지 않도록 네 시간 동안 젓는다.(사진. C영상미디어)



황골엿은 치악산 황골마을에서 만들어진 엿이다. 황골마을은 돌과 굴곡이 많은 지형 탓에 ‘황곡’이라 불리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지금의 이름이 됐다. 땅이 척박한 탓에 논농사보다 옥수수농사가 주를 이뤘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마을 사람들은 옥수수로 엿을 만들어 내다팔았고 그 돈으로 쌀과 소금을 사서 연명했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황골마을에는 여전히 황골엿을 제조하는 몇몇 가게가 모여 지낸다.
황골엿은 단맛이 과하지 않고 말랑말랑하며 갈색 빛을 띠는 갱엿이다. 과거에는 옥수수로 만들었는데 다양한 수요에 맞춰 현재는 쌀도 섞는다. 원재료가 갱엿이 되기까진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걸린다. 새벽 내내 물에 불린 곡물을 갈아서 물과 엿기름(직접 재배한 옥수수의 싹을 틔워 만든다)을 넣고 가마솥에 두 시간 정도 끓이는 과정이 시작이다. 이를 ‘애기죽 끓인다’고 표현한다. 식힌 애기죽에 허리질금(중간에 넣는 엿기름)을 넣고 네 시간가량 둔다. 다시 한 시간 동안 끓인 후 여과한 물을 졸이면 조청이, 이때부터 두세 시간 더 졸이면 갱엿이 된다.
시어머니로부터 황골엿 제조법을 전수받은 김 명인은 40년 넘게 이 작업을 반복해왔다. 제조방식 중 달라진 점이라곤 연료를 장작불에서 가스불로 바꾼 것뿐이다. “몸이 삭는 일”이라는 김 명인의 말처럼 고된 작업이다보니 김 명인은 본인을 마지막으로 가업을 끝내려고 했다. 외동아들인 김기석 씨가 가업을 잇겠다며 먼저 나선 것도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아들은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016년 6대 대표가 됐다.
김 명인 부부와 아들까지 세 사람은 매일 새벽 가마솥 앞에 선다. 그리고 엿물이 솥에 눌어붙지 않도록 네 시간 동안 구석구석 손수 저어야 한다. 가마솥은 모두 여섯 개가 있었다. 김 명인과 김 대표를 만난 이날도 이들은 한참 불을 때다 열을 식히고 있었다. 은은한 단내와 고소한 냄새가 작은 작업실 안을 가득 채웠다.
이 가마솥에서 모든 엿을 만드나요?
(김명자) 두 개는 100년도 더 됐어요. 전에는 가마솥 여섯 개를 다 돌렸는데 이제는 그만큼 엿을 찾는 사람도 없고 힘에 부쳐서 몇 개만 돌려요. 엿에 넣을 땅콩도 생강도 다 우리 손으로 까고 포장도 우리가 해요. 하루 중 쉴 때라곤 작은방에 들어가서 잠깐 눈 붙이는 시간뿐이에요.

사진. C영상미디어


엿 만드는 집안에 시집와서 마주한 풍경이 신기했을 법도 한데 어땠나요?
(김명자) 저는 전남 보성 출신이에요. 흰엿을 길게 늘인 가래엿만 알았지 갱엿은 황골에 와서 처음 봤어요. 아직도 생생한 게 집 뒤꼍으로 돌아가니까 굴뚝 연기가 밑으로 새어나오고 있더라고요. 보통 굴뚝 연기가 하늘로 퍼지잖아요. 바닥에 연기가 자욱해서 깜짝 놀랐어요. 이유가 있었어요. 일제강점기 때 엿 만드는 걸 금지했대요. 한국 전통문화니까 확산되면 안 된다고.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눈을 피하기 위해 연기를 밑으로 나가게 만든 거래요.
며느리가 가업을 잇게 된 이유가 있나요?
(김명자)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전에도 엿을 팔고는 있었지만 사업자등록증을 낸 것도 아니고 제품 이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오일장 같은 데 들고 나가서 팔았거든요. 그러다가 서울에서 많이 팔 수 있을 것 같아서 서울에 있는 시장에 갔는데 하필 그날 관공서에서 단속을 나온 거예요. 밤새 공들여 만든 엿을 두고 불량식품 취급을 하더라고요. 뭘 몰라서 흰 상자에 엿만 부어 갔거든요. 영업정지 운운하는데 얼마나 억울하던지요. 우리 엿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분해서 정식으로 영업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알아봤죠.

김명자·김기석 모자가 직접 만든 조청과 황골엿 (사진. C영상미디어)


장바우 치악산 황골엿의 ‘장바우’는 무슨 뜻인가요?
(김명자) 건강한 마음으로 튼튼하게 하라는 뜻이에요. 유사제품을 구매해서 피해 보는 소비자들이 생길까봐 상표등록도 했어요. 여기 포장지에 그림 보이세요? 남편 사진 들고 컴퓨터학원에 가서 캐릭터를 좀 그려달라고 했다가 제가 마우스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그림이 쪼그라들어버렸어요. 근데 그게 더 예쁜 거예요(웃음).
인생의 절반을 엿을 만들었는데 가장 힘든 때는 언제였나요?
(김명자) 너무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나요(웃음). 20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잠이 많을 때라 새벽마다 일어나는 게 죽을 맛이더라고요. 그때는 솥이 하나뿐이니 밤 12시에 일어나서 새벽 내내 졸이는데 ‘아이고 나 죽겠다’ 했죠. 지금이야 모터 힘을 좀 빌린다지만 그때는 곡물 가는 것도 맷돌로 했으니까요.
6대 대표 김기석 씨는 환경공학을 전공하고 석사과정까지 수료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주말마다 일을 도우러 고향에 내려오곤 했지만 가업을 이을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문득, 이 오랜 전통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대표가 된 김 씨는 더 많은 사람이 엿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 결과 한입에 먹을 수 있는 크기의 제품을 만들어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끌었다.
엿에 대한 요즘 인식은 어떤가요?
(김기석) 엿을 소재로 한 욕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전통을 너무 등한시한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워요. 엿과 조청은 ‘좋은 당’이라고도 하잖아요. 특히 옥수수로 만든 황골엿은 ‘동의보감’에 소화가 잘되고 가래가 삭혀지는 데 도움을 주며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안정된다고 기록돼 있어요. 젊은 분들도 전통 엿을 자주 먹고 즐겨주면 좋겠습니다.
가업을 잇겠다고 나선 것을 후회한 적은 없나요?
(김기석) 아예 없다고 할 순 없죠(웃음). 만드는 일도 판매하는 일도 너무 어려워요. 수능 선물도 요즘엔 엿보다 초콜릿을 선호하더라고요. 외국인들이 즐겨 보는 우리나라 드라마에 엿이나 조청 먹는 장면이 잠깐만 나와 줘도 참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바우 치악산 황골엿을 지켜나가려는 이유는요?
(김기석) 매일 새벽마다 부모님이 엿을 끓이는 모습을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랐어요. 그런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황골엿을 이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부모님처럼 최선을 다해 우리 전통이 잊히지 않도록 하는 게 제게 주어진 역할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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