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목련, 다시 피다
'글. 최명임'

불같은 여름에 목련화라니, 홀연히 찾아와 염천 여름을 즐기고 있다. 질서를 어기고도 고고하게 피었다. 해마다 보아온 고운 화심으로 단박에 봄을 알아채었는데 7월에는 무슨 계절을 달고 와서 저리도 환히 웃고 있을까.
열화같이 꽃을 피우더니 불볕에 숨을 고른다. 온몸이 자주색 희열로 타오르고 있다. 아, 며칠 사이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붙잡아 두었다가 보여주고 싶은 이 있는데 황망히 가버린 나의 젊은 날처럼, 다시 찾아온 나의 봄날이 가듯 바삐 떠난다. 다시 못 올 줄 알기에 아쉬워 꽃잎 속을 기웃거린다.
목련은 겨울이 미적거릴 때 불같이 찾아와 봄을 열어젖힌다. 잎이 먼저 돋고 꽃이 피어야 하거늘 무에그리 급한지 잎도 못 본 채 황황히 사라지는 꽃이다. 기어이 잔설을 뿌리고 가는 겨울에 연한 살갗을 다치고 꽃샘추위에 시퍼런 멍이 들기도 하지만, 저의 소명인 양 한 해도 거르지 않는다.
봄의 꽃으로 명명한 저 목련이 통념을 깨고 칠월에 돌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초봄과 염천 여름의 성격은 아주 달라서 이상 기온이 빚어내는 혼란도 아닐 터이다. 심어놓은 이래 본 적이 없었으니 참으로 의외의 사건인지라 호들갑으로 식구들을 불러내어 소소한 행복을 맛보았다.





우리 집 마당에 유월 장미는 칠팔월을 넘어서 구시월도 마다하지 않고 피고 지는데 11월에도 꽃으로 버티기도 한다. 배롱나무는 백일동안 꽃이 핀다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꽃이 피기 시작하면 비바람이 사달을 내어도 끝끝내 제 날을 채우고 간다. 눈여겨보지 않아도 여느 꽃들 역시 나름의 시간 속에서 만족스레 머물다가 떠날 것이다. 쇠털같이 많은 날 겨우 며칠 머무르다 가는 목련은 억울하기도 했을라나. 어긋난 인연을 향한 그리움이 다시 피는 꽃이 되어, 생전 본 적 없는 초록과의 해후를 시도하는 것일까. 애잔하고도 아름답다.
봄에 핀 목련이 불꽃처럼 타오르다 가버린 청춘이라면, 염천 아래 목련은 산전수전 다 겪어내고 개짐마저 벗어버리고, 농익은 가슴으로 다시 태어난 중년의 꽃이 아닐까. 초봄엔 마른 가지에 홀로 피었기에 그때는 묘령의 아씨처럼 청초하고 고왔다. 지금은 초록 잎사귀에 둘러싸여 농염하고 고고하게 더욱더 고운매로 피어올랐다.
문화 공간에 찾아 들어 귀를 기울이고 눈빛이 유난히 빛나던 그녀들이 생각난다. 이름을 내려놓고 아내로 어미로 치열하게 살아오다 다시 저의 이름을 찾아가는 그녀들은 아름다운 중년들이다. 그녀들 다시 봄이다. 그녀들이 시인으로, 수필가로, 소설가로 다시 찾은 저의 이름에다 새로운 명패를 달고 목련꽃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애써 감추었지만 어느 사이 삐져나온 희끗희끗한 머리가 정겹고 어지간히 살아온 연륜으로 그녀들이 풀어내는 글들은 칠월에 핀 목련의 그것처럼 농익고 넉넉하고 푸짐하고도 깊었다. 섣부른 젊음이 쏟아낸 열정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 그 깊이를 알아보려고 그녀들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젊음은 무에 그리 조급해서 눈 깜빡할 사이에 떠나버리고 때늦은 열망으로 다시 피고자 애쓰는 것일까. 그녀들을 지칭하는 신조어 ‘리본(REBORN)세대’ 나는 7월에 핀 목련 꽃에 그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불순한 언어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으련다.





어쩐지 처음 보았을 때 세월에 얹혀 온 그 무엇이 묵직하게 꽃 속에 숨어있었다. 당돌한 열정은 보이나 청춘의 열광은 아니 보였다. 푸릇함 보다는 자줏빛 결, 염천도 마다않고 다시 핀 목련화에서 깊어진 호흡과 색깔을 보았다.
며칠 사이 퇴색한 꽃잎들이 나무 아래 누웠다. 짧지만 굵게 다시 절정으로 타오르다 회한도 미련도 없이 누웠다. 꽃잎 하나가 초록 잎사귀에 붙들려 시나브로 바래고 있다. 아직 땅 위에 내려앉지 못함은 미련일까. 눈에 밟히는 이 붙들고 작별 인사라도 하는 것일까. 뜬금없이 시조 한 구절이 가슴을 데워온다.
청초 우거진 곳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황진이 무덤 앞에서 읊었다는 임제의 시조를 나는 목련화 주검 앞에서 구성지게 읊었다. 바람처럼 세상을 향유하다 홀연히 사라진 그녀야말로 미련도 회한도 없이 떠났으리라. 목련화 또한 세상에 대한 집착일 리가, 내 눈에만 미련이며 안타까움일 거다.
생기가 사라진 목련 꽃잎에 결결이 숨은 비애와 그리움과 빛나던 날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목련화가 황황히 사라진 뜰에 꽃들이 앞 다투어 피던 봄과는 달리 염천 7월 아래서는 씨알 여무는 소리가 허벌나게 들린다.
목련 꽃에서 나의 스무 살과 나의 중년과 다가올 노년과 그 이후까지도 보았다. 돌아보니 스무 살이 참 아름다웠다. 살아내느라 흘렸던 마흔의 눈물도 아름답다. 파랗게 질려서 흐느끼다가 맛 본 눈물과 그것의 온도가 나를 일으켰으니. 다시 피느라 안간힘 쓰는 지금의 나도 아름답다. 칠월의 목련처럼 활활 타오르는 나의 열정에 보내오는 저 뜨거운 햇살의 애무, 황홀경에 빠진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서 하얀 머리와 자글자글한 주름의 나를 만나면 잘 살았노라고, 애썼다고, 아름답다고 내가 기꺼이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소리 없이 지고 잊혀져가기를….

EDITOR 편집팀
최명임 작가
이메일 : cmi3057@naver.com
2014년 문학저널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 회원, 내육문학회원 / 충청타임즈 ‘생의 한가운데’ 필진(전)
청주교차로 신문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필진(현)
우리 숲 이야기 공모전 수상
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수상
매일 시니어 문학상 수상
수필집 빈 둥지에 부는 바람, 언어를 줍다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