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 여행]
서원팔경 봉림수
'숨겨진 운천동 이야기- 구루물 산책'

‘구루물 산책’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여행]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단행본입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운천동의 숨겨진 다채로운 발굴 이야기를 흥덕사지를 발굴한 지역 전문가를 통해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엮은 책입니다.
Cheapter10. 서원팔경 봉림수
봉림수(鳳林藪)는 무심천 하류의 서쪽 천변인 운천동 일대에 걸쳐 있었던 인공조림이었다.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으나 지금의 운천초등학교부터 그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 산직리 마을에서 동쪽으로 인접하여 무심천에 연한 지역이다. 이 숲에 대한 기록은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처음 나타나는데 청주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북수(北藪)’와 ‘남수(南藪)’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수(藪)’는 늪 또는 덤불이라는 뜻인데 평지에 있는 숲을 일컫는 말로 해석하여 각각 ‘북숲’과 ‘남숲’으로 칭하기도 한다. 청주에는 북쪽과 남쪽에 각각 인공조림으로 조성한 숲이 있었던 것이다. 『여지도서』에 북수는 청주 서쪽(북쪽의 오기) 5리에 있고 봉평(鳳坪)이라 부르는데 효종이 임금에 오르기 전의 ‘봉림’이라 이름 붙였다. 원래는 청주 읍기(邑基)를 누르고 관방(關防)을 위하여 나무를 기르고 수호한다고 하였다. 또한 남수는 남쪽 5리에 있고 인평(麟坪)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폐하였다고 하였다. 남수는 영조 때에 이미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었으니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으나 예전에 남들이라 불리었던 지금의 수곡동 청주교육대학교 일대가 아닐까 추정된다.
북수는 『여지도서』 이후의 지리지에는 명칭만 봉림수로 바뀌었을 뿐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고, 1932년에 간행된 『조선환여승람』에는 ‘봉림조하(鳳林朝霞)’라 하여 봉림수의 아침노을이 서원8경의 하나로 소개되었다. 이러한 기록들에 의하면 봉림수는 일제강점기초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청주고지도 속 봉림수(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구례 운조루에 소장된 「청주읍성도」를 비롯한 청주의 고지도에도 무심천 하류부분에 울창한 모습의 숲을 그려 넣고 봉림수라 표기한 것이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어서 숲의 위치와 형태를 짐작하게 해준다.
서원팔경(西原八景)
상당귀운(上黨歸雲) 상당산성 떠가는 구름
금천어화(金川漁火) 쇠내의 고기 잡는 불빛
선루제월(仙樓霽月) 비개인 망선루에 비치는 달빛
봉림조하(鳳林朝霞) 봉림수의 아침 노을
석교석구(石橋石狗) 남석교 법수의 개모양 석상
동장철학(銅檣鐵鶴) 철당간에 앉은 철학
우산목적(牛山牧笛) 와우산 목동의 피리소리
낙가석조(洛迦夕照) 낙가산의 저녁 노을
봉림수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청주읍기를 누르고 관방을 위하여 나무를 심고 수호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풍수지리 사상에 의해 청주의 북쪽에 산이 없는 약점을 비보(裨補)하기 위한 인공림이었음은 분명하다. 즉, 북수(봉림수)를 후산(後山)으로 하고, 남수를 안산(案山)으로 삼기 위해 인공의 비보림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봉림수의 위치가 무심천의 하류이고 천변의 저지대에 조성된 것은 무심천 범람에 대비한 것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다시 말해 봉림수는 풍수비보에 따라 청주의 배후로 조성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심천이 범람할 경우 유속을 줄이고 둑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일설에는 이인좌의 난 때 이곳에서 병기를 상여로 가장하여 청주읍성으로 진입하였다고 하며, 가뭄이 들었을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운천동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들 사찰의 북쪽에 숲을 조성하여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인 동시에 무심천의 범람에 대비한 방수림이며 호안림의 역할까지 하는 다목적 숲이었다. 이와 같은 비보림은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남 함양의 상림(上林)이 유명하다. 청주 무심천처럼 함양읍의 서쪽을 흐르는 위천(渭川)가를 따라서 조림한 호안림으로 지금은 꽃무릇과 각종 야생화로 꾸며진 꽃동산이 울창한 수목과 어우러져 함양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이 숲은 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崔致遠)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조림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위천은 함양읍의 중앙을 흐르며 매년 홍수의 피해가 심했으므로, 최치원은 농민을 동원하여 둑을 쌓고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의 숲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대관림(大館林)이라 이름을 지어 잘 보호하여 홍수의 해를 막을 수 있었는데, 언젠가 대홍수에 의해서 둑의 중간이 파괴되고 지금의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다. 상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의 하나인데 현재는 풍치림의 구실이 더 크다.
하동의 송림 역시 천연기념물로서 조선 영조 21년(1745년) 당시 도호부사 전천상이 광양만의 해풍과 섬진강의 모래바람을 막아 하동읍(당시 청하읍)을 보호할 목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조성 당시 1,500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으나, 현재에는 후계목을 포함하여 900여 그루가 있다. 260여 년의 세월을 견뎌온 노송과 맑은 섬진강 물, 드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며, 시인 묵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래서인지 하동을 백사청송, 백사청죽의 고장이라 부른다. 하동송림은 과거부터 아낙네들의 화전놀이의 장소였고, 송림 앞 백사장은 바닷물이 들어와 내륙 해수욕장의 역할까지도 하고 있어, 지역민들과 관광객들의 자연학습장과 휴양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백사장에서 하동군민의 소망을 담은 달집을 태우며, 이웃 전라도민과 화합의 장이 된다.

함양 상림



운천동에 있었던 봉림수 역시 함양 상림이나 하동 송림보다도 훨씬 넓은 면적의 숲이었을 것이나 일제강점 초기에 나무를 베어내고 농지로 만들면서 없어졌다. 잡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여단(?壇)도 이 봉림수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우제단도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잘 보존되었더라면 당연히 천연기념물이 되었을 것이고 서원팔경의 하나로서 청주시민의 휴식과 치유의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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