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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피어난 들꽃의 노래로 다시 서는 6월
흐드러지게 피어난 들꽃의 노래로 다시 서는 6월
'충북 레이크파크 르네상스 충북의 물길에 깃든 이야기를 찾아가다 (제천Ⅰ)'

실핏줄처럼 퍼지는 제천 북부의 물길에서 고동 소리를 들었다. 발길은 백운면, 봉양읍, 송학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졌다. 학이 날고 내려앉았다는 마을들, 제국주의 열강의 만행에 비분강개하여 일어선 사람들, 삼국시대부터 나라에서 인공으로 물을 가두어 농업용수로 사용했던 의림지. 발길이 멈춘 곳은 제천 북동쪽 끝, 관란정이었다. 휘돌아 흐르는 서강 물줄기를 굽어보던 그곳에서 순국선열묘역의 ‘칠의사총’ 앞에 피어난 작은 들꽃 한 송이의 이유를 생각했다.
학이 날아와 앉았다던, 쉴만한 물가의 마을들
원서천 최상류 오두재골, 그곳에서 해발 고도 400∼500m 더 올라가면 충북 제천과 강원도 원주의 경계 백운산 오두재다. 오두재골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와 또 다른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만나 원서천의 이름으로 흐른다. 그 언저리에 있는 덕동생태숲을 지나 물 흐르는 대로 발길을 옮기면 백운산의 또 다른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줄기인 운학천과 원서천이 만나는 곳이 나온다.
운학천 물길을 거슬러 올라 상류에 도착했다. 그곳에도 잘 가꾸어진 밭이 있었고, 맑은 계곡물이 세차게 흘렀다. 물길이 시작되는 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산 어디쯤이었다. 그 물줄기가 만든 첫 마을이 백운면 운학2리 ‘차뛰’ 마을이었다. 마을에 ‘차뛰’의 어원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차도리’라고도 불렀다고 마을 어떤 분이 알려주셨는데, 그분도 ‘차뛰’, ‘차도리’의 어원을 알지 못했다. 다만 옛날부터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셨다.
백운산과 구학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구학산에서 날아오른 아홉 마리 학 중 한 마리가 운학리 마을에 내려앉는 형국이고, 한 마리는 방학리 마을에 내려앉은 형국이라신다. 세 번째 학은 송학면으로 날아갔다고 하는데, 송학면 용두산에는 수만 그루의 자연 송림이 군락을 이루었다는 숲이 있다. 송학면으로 날아갔다는 학이 아마도 그 송림에 둥지를 튼 건 아닐까? 용두산 송림공원을 지나면 의림지 솔밭공원 솔숲이 나온다. 그 아래 의림지 제방에 뿌리를 내린 노송들이 이룬 군락이 있다. 구학산 아홉 마리 학 중 세 마리는 이렇게 제천에 앉았고, 여섯 마리는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관란정에서 본 서강 물돌이



운학2리 차도리 마을 어르신을 따라 마을을 돌아봤다. 보기 드문 붉은 꽃잎 아카시아를 운학천 물가에서 보았다. 개울 건너 봉긋하게 솟은 작은 봉우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느 집 마당에 핀 복주머니란 꽃은 마을 산소 주변에서 자생하는 것을 발견하여 옮겨 심은 것이다. 미나리아재비 노란 꽃을 보고 마을 골목길로 나서는데, 큰으아리 꽃도 보고 가라신다. 낯선 이의 꽃구경에 마을 아주머니와 할아버지도 곁을 내주신다. 참 쉴만한 물가 마을, 마을 사람들이다.
여덟 그루 소나무와 제천천이 어우러진 탁사정
구학산 아래 구학리를 지나는 제천천에는 여덟 그루 소나무와 팔송정 이야기가 전해진다. 탁사정의 옛 이름이 팔송정이다.
조선시대 제주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임응룡이 해송 여덟 그루를 가지고 와서 이곳에 심었다. 그의 아들 희운이 정자를 짓고 팔송정이라고 했다.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났고, 무너진 정자를 다시 세운 건 후손 윤근이다. 그때 탁사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탁사정은 제천천에서 솟은 절벽 위에 있다. 탁사정에서 굽어보는 제천천 풍경도 좋지만, 탁사정 절벽 아래 흐르는 짙푸른 제천천 용소의 물길과 절벽을 한눈에 바라보는 풍경이 낫다. 탁사정은 정자의 이름이자 그 일대를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지금은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에 탁사정 계곡의 시원하고 통쾌한 풍경이 숨어있다.
임응룡이 가져다 심은 해송 여덟 그루는 사라지고, 팔송리라는 이름만 남아있다. 팔송리를 지난 제천천은 봉양읍 공전리에서 원박천을 받아들인다. 원박천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그 유명한 박달재를 만나게 된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 가사 중 일부- 박달재에 울려퍼지는 노래는 예나 지금이나 구성지다. 어떤 누구는 사랑을 시작하고 어떤 누구는 헤어지는 오늘 이 시간, 박달재 고갯마루를 지키는 나뭇가지가 일렁인다. 박달재에 바람이 분다.
싯개와 장담, 그리고 의병들
제천천과 원박천이 만나는 합수지점부터 백운면 애련리 724, 영화 <박하사탕> 촬영지까지 약 4.5㎞ 물길은 태극문양으로 흐른다.
그 구간의 끝 지점인 <박하사탕> 촬영지는 냇가 야유회 장면과 철로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말을 비명처럼 외치며 인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언제나 이곳에 오면 영화의 감동이 되살아난다.
‘영화의 고향, 충청북도 제천시 진소마을’이라는 제목의 비가 영화 <박하사탕> 촬영장소임을 알려준다. 냇물 둔치 자갈밭과 풀밭을 보며 철교 쪽으로 걷는다. 꾸미지 않은 냇가 수수한 길은 철교 교각 사이를 지나 냇물 옆 모래밭에 닿는다. 물기슭 모래밭에 나이테처럼 새겨진 물결의 흔적에서 흐르는 세월을 본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펼쳐지는 영화 <박하사탕>처럼 물결의 나이테를 가늠해본다. 냇물을 거슬러 오르면 공전역이 나온다.

영화 '박하사탕' 촬영지. 철길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장면을 촬영했다



공전역 앞 제천천을 마을 사람들은 싯개라고 부른다. 제천시 자료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군인들이 이곳 냇가에서 밥을 먹었다고 해서 식개, 또는 식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며 식개가 싯개로 변한 건 아닐까? 1970∼80년대 공전역 1년 이용객이 10만 명이 넘었고 점포도 7∼8 개 정도 있었다고 한다. 공전3리 마을회관 앞에 번성했던 그 시절 마을 모습을 재현했다. 재현한 점포 중 ‘식포상회’라는 간판이 보인다. 철길 건너편 길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싯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여울물 소리와 지나가는 기차 소리가 공중에서 울린다. 햇볕에 휘발된 물비린내가 그 소리에 섞인다.
싯개 물길 상류를 장담(長潭)이라고 부른다. 장담은 긴 못이다. 연못이나 물이 고이는 웅덩이가 길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장담 마을에는 의병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천시 자료에 조선시대 고종 임금 때 학자인 유중교 선생은 1889년 춘천에서 이곳으로 집을 옮겨 자양서사를 세우고 후학을 양성했다고 나온다.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을 넘보던 시절 척양척왜를 주장했다. 유중교 선생의 재종질(6촌 형제의 아들)인 유인석 선생도 자양서사의 한 인물이었다. 유인석 선생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 등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이 되어 충주성을 장악하기도 했다. 의병을 해산하고 연해주로 가서 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1915년 세상을 떠났다. 장담 마을에 유중교 선생 살던 집, 유인석 선생 살던 집, 제천 의병전시관, 사당인 자양영당이 있다.
단종을 그리며 단을 세우고 절을 올리다
제천시 모산동 의림지 둘레를 한 바퀴 걸었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림지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당시 기록에는 ‘의림제’로 적혀 있다. 제방 길이가 530척(약 160m)이며 논 4백 결(약 121만평)에 물을 댄다고 했다. 1899년 제천군 읍지에는 둘레가 1천805척(약 547m)이라고 했다.
의림지가 처음 만들어진 때는 신라시대 진흥왕 때라고 한다. 인공으로 물을 가두고 농업용수로 사용하던 의림지를 보호하기 위해 제방에 나무를 심기도 했다. 나무의 뿌리가 제방을 지지해서 침식이나 유실을 막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심은 나무 중에 200∼400년 된 나무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

의림지 제방 영호정



의림지의 노송 군락이 만드는 경치가 수려하여 1807년 이집경 선생은 영호정을 지었다. 경호루는 1948년 지은 2층 누각이다. 조선시대에는 우륵당, 의림정, 진섭헌, 후선각, 임소정, 대송정, 홍류정 등 지금 보다 정자가 많았다고 한다. 의림지 노송 군락 한쪽에 용추폭포가 있다. 조선시대 작자 미상의 그림에 나온다. 권신응이 그린 의림지도 있다. 옛 그림을 떠올리며 용추폭포 전망대에서 폭포의 물줄기를 굽어본다.
제천 북부 서쪽에서 시작한 발걸음을 제천 북동쪽 끝에 위치한 관란정에서 멈췄다. 절벽 위에 지어진 관란정 앞에 서면 서강 물줄기가 휘돌아 나가는 풍경을 굽어볼 수 있다. 그렇게 20여㎞를 흘러 물길이 닿는 곳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 임금의 유배지, 강원도 영월 청령포다. 관란정은 관란 원호 선생이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을 그리며 단을 세우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절을 올리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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